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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가정보

도금봉, 김혜수같은 관능적 여배우였다

by 피앙새 2009.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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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금봉(본명 정옥순) 하면 요즘 세대는 잘 모르는 배우입니다. 그러나 386세대들이면 누구나 다 아는 당대 명배우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김혜수 정도의 배우로 60년대말부터 70년대까지 최고 관능파 여배우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지난 3일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로배우 도금봉의 타계를 보면서 한 시절을 풍미했던 명배우라도 이렇게 쓸쓸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대중스타의 인기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뒤늦게 그녀의 죽음이 알려졌지만 오늘(6일) 발인후 화장되어 납골당에 봉안될 예정입니다. 그녀는 이제 추억의 은막 스타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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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복지시설에서 쓸쓸히 세상을 떠나며 그녀는 '눈을 감게되면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순신장군도 아닌데 왜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했을까요? 은퇴후 두 아들과 살다가 마지막에는 복지시설에서 살 정도로 어렵게 살아온 자신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싫었던 것은 아닐까요?

도금봉은 '창공' 악극단에서 '지일화'라는 예명으로 이름을 떨치다 1957년 '황진이'로 영화계에 데뷔했습니다. <황진이>라는 영화에서 ‘요부’ 캐릭터를 너무 잘 소화해내 그 당시 마릴린몬로 같은 ‘세기의 여우(妖優)'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만큼 섹시미가 뛰어나 당대 여배우중 최고의 배우로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녀가 이름을 도금봉이라고 지은 것은 데뷔 당시 황진이가 살았던 개성의 옛 이름인 송도의 도(都), 황진이가 즐긴 가야금의 금(琴), 그리고 영화계의 봉우리가 되라는 뜻의 봉(峰)을 한자씩 따서 지은것이라고 합니다. 젊은 시절 도금봉과 지금 김혜수를 보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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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금봉이란 이름처럼 그녀는 한국 영화가 한창 발전하던 60~70년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내시> 등 총 50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1963년 영화 <새댁>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 1972년 <작은 꿈이 꽃필 때>, 1974년 <토지>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두 차례나 수상했습니다. 섹시미 넘치는 여우 ‘주연’ 이미지가 강했지만 김지미, 최은희, 엄앵란 등과 활동하면서 조연으로도 많은 활약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아버님께서 가장 좋아하시던 배우가 도금봉이었습니다. 60~70년대 흑백 영화시절에 아버님은 도금봉이 출연한 영화는 거의 다 보았다고 합니다. 도금봉은 나이가 들면서 영화에 출연이 힘들어지자, TV 드라마에서 주로 활동하다 1997년 박찬욱 감독의 <삼인조>에서 전당포 노파역을 끝으로 40년간의 배우 생활을 끝냈습니다. 충청도 사투리를 능청스럽게 구사하는 무지렁이 촌부에서부터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요부, 그리고 천하를 호령하는 왕비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의 폭은 당시 여배우중 최고였고, 그 모든 역할을 완벽하게 강렬하게 소화해낸 명배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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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에서 40년간 활동하며 우리 문화발전에 큰 기여를 한 그녀의 죽음은 정말 쓸쓸했습니다. 요즘은 정부에서 문화훈장도 많이 주고 하는데, 도금봉씨야 말로 문화훈장을 받을 만큼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해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유언했을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도금봉씨의 한국 영화계에 남긴 업적은 인정받아야 마땅합니다.

한국전쟁후 영화 산업은 그야말로 황무지였습니다. 1960년대 흑백영화시절부터 1997년까지 무려 50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해 기여해온 도금봉은 세간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오늘 한줌의 재로 변했습니다. 그녀는 떠났지만 올드 영화팬들의 가슴속에 오래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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