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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행복

20년 전 남편이 썼던 편지를 다시 보니

by 피앙새 2009. 5.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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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남편이 써준 연애편지는 낭만이 있었지만 결혼후 써준 편지에는 힘들고 어렵던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나 눈시울을 붉힐 때가 많습니다. 특히 신혼초 젊음 하나만 믿고 결혼한 우리 부부는 라면만 먹고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았지만 그 낭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라면보다 밥이 더 좋아보이면서 우리 부부의 삶은 낭만보다 자연스럽게 현실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20대 젊은 시절은 지금보다 훨씬 용감했는지 모릅니다. 부모님 도움 없이도 사랑만 있다면 세상 그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수 있다며 결혼할 생각도 쉽게 했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남편과 저는 대학 졸업후 먼저 취직한 제가 그동안 조금 모아 놓은 돈으로 부모님 도움 없이 결혼식도 올리고 달동네에서 단칸방 하나 얻어 신혼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웃음도 나옵니다.


막상 결혼은 했지만  둘만의 힘으로 살아 가려니 모든 것이 힘들었습니다. 겨울에는 연탄을 때다가 가스에 중독돼 큰 어려움도 겪어봤습니다. 제가 직장다니면서 모아 두었던 돈은 가구와 신혼 살림살이들을 하나씩 준비하며 살다보니 주머니는 항상 비어 있었습니다. 결혼하던 그 해 겨울, 남편은 졸업후 취직 준비를 하고 있어서 더욱 힘들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습니다.

어느 날 덥수룩한 남편에게 이발을 하라고 돈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 이발비에서 남은 돈 500원과 제가 집에 놓고간 잔돈 600원을 합해서 토큰(당시 버스 승차권) 11개를 구입한다는 메모 편지를 써놓고 아르바이트를 나간 것입니다. 그 때 남편의 메모 편지를 보고 그때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대학을 졸업 후 취직이 안돼 마음 고생도 심한데 변변한 용돈도 없이 하루 하루 보내는 남편이 측은하기까지 했습니다. 고생 끝에 남편은 원하던 회사에 입사를 해서 지금까지 잘 다니고 있습니다.

남편이 제게 늘 하던 말이 있었습니다. “가난은 불편할 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말대로 우리 부부는 신혼 때 정말 불편함을 많이 겪고 살았습니다. 남편과 저는 오늘 사과 한 개가 있으면 반쪽만 먹고 나머지 반쪽은 내일을 위해 남겨두는 성격입니다. 좋은 일도 나중으로 미루고 신혼 때는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게 20년을 살아오니 남편은 어느새 머리도 희끗 희끗해지고, 얼굴에 삶의 훈장인 주름살도 하나 둘씩 늘어갑니다.


지난 주말에 남편과 모처럼 등산을 갔습니다. 산을 오르며 제가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20년 넘도록 좋은 것들은 다 남겨두고 미루어 두었는데, 이제 우리도 좋은 것도 먹고 남들처럼 좋은 곳도 다니며 살 나이 아닌가요?”  제 말에 남편은 빙그레 웃으며,

“30년은 넘어야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곳을 다니지... 이제 10년만 더 열심히 살자구요”

아직 남편은 가야할 길이 먼 것 같습니다. 남편이 가야하는 종착점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남편은 결혼 후 한결같이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습니다. 힘들 때마다 연애시절과 신혼시절 남편이 써준 편지를 가끔씩 읽어보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더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때도 잘 참고 살아왔는데, 지금의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편지를 보며 힘을 얻곤 합니다. 그래서 남편의 편지가 제게는 힘을 주는 영영제와 같습니다.

지금은 남편이 편지 대신 문자를 가끔 보내주기도 하지만 제가 더 많은 문자와 전화를 합니다. 점심때면 식사는 하셨는지, 저녁때 퇴근이 늦으면 힘은 들지 않았는지 등 비록 몸은 함께 있지 않아도 늘 남편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도 늦느냐는 제 문자메시지에 달랑 “응” 이라는 한 마디 문자만 해줘도 그 한마디가 제겐 힘의 원천이고 삶의 영양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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