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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현대판 신사임당 김연아 모친 박미희여사

by 피앙새 2009.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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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가정주부지만 시와 글씨, 그림 등 사대부가 아녀자에게 요구되는 덕행을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이 시대 주부들의 롤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신사임당 없는 율곡 이이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들 이이는 어머니 신사임당의 생전 기록을 담은 <행장기>를 지어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은 물론, 우아하고 여인네가 지녀야할 우아한 성품을 낱낱히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시대 신사임당 못지 않은 현대판 신사임당이 있으니 바로 피겨 김연아선수의 어머니 박미희여사입니다. 박미희여사는 김연아를 '피겨여왕'으로 만든 1등 공신입니다. 물론 브라이언 오셔 코치 등 스탭들의 공로도 있지만 김연아선수의 재능을 일찍 발견하고 피겨 불모지에서 세계적인 피겨퀸을 만든 박미희여사의 선견지명은 시공을 뛰어넘어 조선시대 신사임당을 보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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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의 나이 다섯살때 우연히 아이스링크에 데리고 가서 스케이트를 처음 신겼는데, 유달리 남다른 재능과 호기심을 보이던 딸을 보고 엄마는 '이거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운동을 시켜도 돈이 되는 운동을 시키는게 부모들의 생각인데, 10년전 우리 나라 피겨스케이팅은 그야말로 황무지였고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딸이 피겨에 재능도 있거니와 관심을 보여 김여아의 의지대로 피겨스케이팅을 할 수 있도록 그때부터 열성적인 후원자가 되어 늘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습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여 피겨스케이팅을 시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유일하게 김연아가 운동할 수 있도록 지원하던 아버지의 중소기업마저 어려움에 처하고 김연아 또한 사춘기에 접어 들며 충돌이 잦아지는 등 위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2006년은 김연아와 박씨에겐 뜻 깊은 한해였습니다. 바로 그해에 열렸던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일본의 자랑인 아사다 마오를 물리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피겨선수의 생명과도 같은 발에 딱 맞는 스케이트를 구하는 문제, 한국 빙상연맹의 열악한 지원, 김연아선수의 고질적인 허리 부상 등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빙판장에 어머니가 흘린 눈물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러나  박미희여사는 여자보다 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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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선수는 연습을 하면서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그러나 박미희여사는 바로 가서 일으켜세우지 않고 김연아가 스스로 일어서게 했습니다. 넘어지고도 혼자 일어날 수 있는 힘을 길러준 박미희여사의 김연아 교육방식은 바로 500여년전 신사임당이 율곡 이이 선생을 가르치던 모습과 같습니다. 비록 가르치는 내용은 달라도 자식에 대한 엄격한 교육방식은 시공을 초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박미희여사를 현대판 신사임당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전용 피겨링크장 하나 없는 척박한 한국 피겨스케이팅계에서 김연아가 살아 남기란 정말 힘든 고행길과 같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러 저리 실내 링크를 떠돌며 딸과 함께 훈련을 하며 엄마 박미희씨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리고 지금과 같이 딸이 세계적인 선수로 우뚝 설 것이란 생각이 들었을까요?

박민희씨는 수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딸의 재능을 믿고 끝까지 운동을 할 수 있도록 꿋꿋하게 뒷바라지 하였고, 김연아는 어머니의 헌신을 잊지 않고 열심히 운동에 전념하여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만일 박미희여사가 강한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세계적인 김연아선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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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희여사는 김연아선수의 그림자입니다. 딸이기에 누구보다 김연아의 심리상태나 컨디션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유능한 코치라도 박미희여사만큼 김연아선수를 알지 못합니다. 김연아선수의 눈빛만 봐도 컨디션이나 심적 부담 정도를 알 수 있으니 박미희여사만한 코치가 따로 없습니다.

피겨여왕 김연아선수 뒤에서 고생한 박미희여사에게도 무한한 찬사와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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