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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좋아

조선시대 외교의 달인! 한확 신도비와 묘소

by 피앙새 2024.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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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중국의 화친 시대를 연 외교의 달인으로 등극한 관리가 있었으니 바로 한확(韓確, 1403~1456) 선생입니다. 한확은 조선 전기 문신이자 외교관이며 명나라 문신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수대비의 아버지로, 성종의 외할아버지입니다.

조선 7대 왕 세조(世祖)가 자신이 죽은 후 능() 자리로 생각하던 곳이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입니다. 조안면은 슬로시터로 유명한 곳입니다. 한확 선생이 돌아가시자 세조가 그에게 묏자리를 주었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한확의 묘소가 왕릉과 비슷한 크기라 하여 후일 능내, 능내동이라는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하니 얼마나 묘가 큰지 궁금합니다.

그럼 한확의 묘로 가볼까요? 경기도 성남시에서 약 40여 분 정도 달려 능내리에 도착했습니다. 입구에 예쁜 도자기 카페가 있습니다. 도자기 중 안동 하회탈처럼 웃고 있는 항아리가 있네요. 우리네 인생 힘들더라도 이렇게 웃고 살아야겠죠.

한확 선생 묘 입구에 신도비각이 보입니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 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입니다. 2품 이상 벼슬에 있었거나 사후 추증된 사람 무덤의 동남쪽 입구에 세우며 '신이 다니는 길을 나타낸 비'라는 뜻입니다. 이 비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한확 선생의 공적을 기린 곳입니다.

신도비는 2층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세우고 용을 조각한 머릿돌을 얹었습니다. 대리석 재질의 신도비를 비와 바람에서 보호하기 위해 후손이 비각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위엄이 대단합니다. 이런 귀중한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 소화기가 비치되어 있습니다.

비각 안의 비문 윗면을 보니 연꽃무늬가 보입니다. 비문에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국교를 원활하게 한 그의 공로가 적혀 있다고 하는데요, 마모돼서 비문이 잘 안 보입니다. 신도비 윗부분에 전서로 '양절 한공 신도 비명'이라고 쓴 것만 보입니다.

신도비각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27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신도비 앞쪽에 수백 년 된 향나무가 마치 비석을 지키기라도 하듯이 고고하게 서 있습니다.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과 어울려 아름답기 그지없습니다.

신도비를 지나 언덕을 조금 올라야 한확의 묘입니다. 묘 입구에 한확 선생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안내판을 참조해 한확 선생을 잠깐 소개할게요. 한확 선생은 음서제(蔭敍制)로 관직에 올랐습니다. '음서제'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양반 신분을 우대하여 친족 및 처족을 과거와 같은 선발 기준이 아닌 출신을 고려하여 관리로 사용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오늘날 공명정대한 공직 선발에 비하면 불공평한 제도였죠. 한확은 음서제로 관직에 들어왔지만, 활동은 왕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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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확은 1417(태종 17) 명나라 초청을 받고 명나라에 가서 벼슬을 지냈으며, 귀국 후 판한성부사, 판병조사 등을 거쳐 의정부 좌의정에 이르렀습니다. 명나라 영락제 후궁 여비 한씨, 선종의 후궁 공신 부인은 그의 넷째, 다섯째 누이입니다. 1418년 세종의 책봉 고명과 1455년 세조의 책봉 고명을 명나라에서 받아왔습니다. 그는 누이들이 황제의 후궁인 점을 활용하여 외교관으로 활동했습니다.

한확의 누나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이 되면서 명나라 황실의 벼슬을 받고 외교채널이 된 거죠. 두 명의 누이가 명나라 후궁이니 오빠인 한확의 권세는 말할 나위가 없을 겁니다. 한확은 그 힘으로 세종 2(1420) 명나라에 가서 금·은의 공물 면제를 허락받고 돌아왔습니다. 세조 2(1456)에는 사은사(謝恩使, 조선 시대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에 보냈던 답례 사신)로 중국 연경에 가서 세조의 왕위 정당성을 명나라에 설득하여 외교에 크게 공헌하기도 했습니다.

한확은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길에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 돌아오던 중, 병을 얻어 귀환하는 도중에 객사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56세였습니다. 사후 시신은 국내로 운구되어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안장되었습니다.

묘를 올려다보니 뒤쪽으로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습니다. 조선 시대 관리 무덤치고는 아주 큰 규모에 놀랍니다. 지명조차 바꿀 만큼 막강한 권력을 누린 한확 선생의 묘는 잡초 하나 없이 정돈되어 있습니다.

묘는 문인석 2, 망주석 2, 장명등 1개를 세우고도 넓은 터가 있을 정도입니다. 막강한 권력을 누린 만큼 한확 선생의 묘는 왕릉 못지않은 위용을 자랑합니다. 혼유석과 향로석은 최근에 조성되었는지 새것처럼 느껴집니다. 풍수지리설은 잘 모르지만, 아마도 당시로서는 명당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전국 팔도 중에서 풍수가 아름다운 이곳에 묻힌 것은 한확이 덕망이 높았기 때문이겠죠.

한확 묘의 장명등을 보니 매우 큽니다. 왕릉에 있는 장명등만큼 크네요. 조선 시대에는 왕이나 세력가의 무덤 즉, 3품 이상 관리의 무덤 앞 장명등이 설치되었습니다. 장명등 큰 구멍을 통해 능내리 마을이 보입니다.

망주석에 다람쥐가 새겨져 있습니다. 한쪽은 올라가고 또 다른 한쪽은 다람쥐가 내려오는 모습입니다. 왜 다람쥐가 있을까요? 동쪽의 망주석은 다람쥐가 불을 켜기 위해 올라가고요, 서쪽은 불을 끄고 내려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한확 묘역에서 내려다보니 신도비각과 향나무의 위엄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아래쪽 경사진 둔덕이 꽤 높아 위에서 아래를 보면 한눈에 동네가 보일 만큼 높이가 있는 산입니다.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을 풍경이 아스라이 내려다보입니다.

지금까지 조선 시대 외교의 달인 한확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조선 역사상 이렇게 화려한 스펙을 자랑하는 관리는 아마도 없을 겁니다.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요, 한확 선생은 중국 황실과 조선 왕실 2대에 걸쳐 인연을 맺고 자녀 중 둘째 딸은 세종의 서자 계양군, 여섯째 딸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에 출가했고, 3남 한치례는 세종의 적녀 정의공주의 차녀와 결혼하는 등 막강한 인맥을 자랑하기도 했지요.

이렇게 막강한 권력을 누린 한확이지만, 검소하고 청렴했다고 합니다. 넓은 도량과 온화한 성품으로 상하의 신망이 있었으며, 명나라 황실과의 유대와 공정하고 결단성 있는 정사로 외교와 내치에 크게 공헌하였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죽어도 왕릉 못지않은 묘소에 잠들어 있지 않을까요? 한확은 오늘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편안히 화무십일홍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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