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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좋아

세조와 정희왕후가 함께 잠든 광릉

by 피앙새 2022.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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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에 있는 광릉은 조선 7대 임금 세조(1417년 음력 929~1468년 음력 98)와 그의 비 정희왕후(1418년 음력 1111~1483년 음력 330)가 잠든 곳입니다. 광릉 하면 먼저 광릉숲이 생각나죠. 광릉숲에는 옛사랑길, 왕숙천 물내음길 등 총 8개의 둘레길이 있습니다. 동지섯달 한겨울 칼바람이 불었지만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광릉을 둘러봤습니다.

광릉숲은 조선 시대 제7대 왕이었던 세조와 정희왕후의 왕실림입니다. 세조가 생전에 이곳을 미리 정해 엄격하게 숲 관리를 해오다 1911년 갑종요존 예정임야(으뜸으로 보존될 예정인 임야)에 편입시키면서 지금의 광릉숲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릉숲을 세조의 숲이라고 불리기도 한답니다. 550여 년간 훼손되지 않고 보존된 덕분에 울창한 숲이 되었습니다.

광릉숲을 품고 있는 광릉은 다른 왕릉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자연림 속에 있습니다. 광릉의 역사는 입장 후 광릉 역사문화관에 들어가면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입장료를 낸 후 들어가면 바로 만날 수 있습니다.

광릉은 1468(예종 즉위)에 세조가 52세로 세상을 떠나, 같은 해 주엽산(지금의 죽엽산) 아래에 광릉을 조성하였습니다. 본래 이 자리는 동래정씨 정창손의 선대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광릉이 조성되면서 동래정씨 묘역은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하는 일부 풍수가들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 후 1483(성종 14)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 씨가 온양 행궁에서 66세로 세상을 떠나, 같은 해에 광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습니다.

광릉 역사문화관을 나오면 재실(齎室)이 보입니다. 재실은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입니다. 평상시에 능참봉(9)이 근무하며 능역을 관리하며 지키는 장소죠. 조선 후기 문헌인 춘관통고에 의하면 전사청 6, 제기고 3, 안향청, 재실 6칸으로 구성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하네요. 현재는 재실과 일부 행랑만 남아 있습니다. 재실은 제사를 지내는 엄숙한 곳이라 단청을 하지 않았습니다.

재실에서 나와 광릉까지 약 10여 분 걸어가야 합니다. 숲길 초입에 조선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기념석이 있습니다. 1392년 개국한 조선왕조는 1910년까지 519년 동안 27대에 걸쳐 왕과 왕비를 배출하였습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인 조선왕릉은 총 42기가 있죠. 북한에 있는 제릉(태조 왕비 신의왕후의 묘)과 후릉(정종의 묘) 2기를 제외하고 모두 유네스코에 등재됐습니다.

유네스코 등재 기념물을 지나면 비석 두 개가 있습니다. 오른쪽은 광릉이 사적지(197)라는 표석이고요, 왼쪽은 하마비입니다. 누구든 이곳에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는 거죠. 광릉은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하마비(下馬碑)가 있습니다.

한겨울이지만 흙길이라 걷기 좋았습니다. 길이 얼어서 조금 미끄러웠지만 이런 흙길 정말 오랜만에 걸어보네요. 이런 길은 온종일 걸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겠죠. 걸으면서 백성을 끔찍이 사랑한 세조와 정희왕후를 생각해보며 걸었습니다.

어느새 홍살문 앞에 왔습니다. 앞에 한 부부가 다정하게 걷고 있네요. 왕릉의 주요 배치는 홍살문, ·어로, 정자각, 능침 순입니다. 광릉도 홍살문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홍살문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입니다. 궁전이나 서원, 향교에도 세워져 있죠.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 놓았습니다. 악귀를 쫓는다는 의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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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왕릉의 홍살문을 지나면 향로(香路)와 어로(御路)가 나오는데 광릉은 없습니다. 향로와 어로는 홍살문에서 침전까지 이어진 길을 말합니다. 광릉의 향로와 어로는 유실되어서 없다고 하네요. 향로가 어로가 아닌 흙길을 걸어가면 정자각이 나옵니다. 광릉의 정자각은 세조의 능역 앞에 있었는데요, 정희왕후 능을 조성하면서 두 능의 사이로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정자각 뒤로 왼쪽에는 세조의 수라간이, 오른쪽에는 정희왕후의 능과 비각, 수복방이 있습니다. 세조는 생전에 후궁을 거의 두지 않았고, 신하들과 함께 하는 술자리와 국가의 대소사에도 정희왕후를 동반할 정도로 가정적인 왕이었다고 하네요. 그런 세조와 정희왕후의 사랑을 보여주듯이 마주 보고 있는 두개의 능이 다정하게 보입니다. 죽어서도 변치 않는 왕과 왕비의 사랑처럼 말이죠.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세조, 오른쪽 언덕이 정희왕후의 능입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라는 유명을 남겼다네요.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 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했습니다.

어느 왕릉이든 관리상의 문제로 올라가지 못합니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모신 형태입니다. 능 중간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 최초로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남양주시에는 세계문화유산이 많은데요, 바로 왕릉입니다. 왕릉은 아이들과 함께 조선 역사를 배울 수 있는 곳이죠. 조선왕릉은 인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수도권에 사신다면 남양주시 가볼 만한 곳으로 잘 알려진 왕릉을 방문하면 어떨까요? 그중에서도 세조와 정희왕후의 묘가 있는 광릉을 방문해 부부간, 가족 간 사랑을 확인해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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