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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좋아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행궁에 담긴 역사

by 피앙새 2022.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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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개봉된 영화 남한산성보셨나요?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입니다. 청나라 대군이 공격해오자 인조와 조정은 적을 피해 남한산성을 피신합니다. 추위와 굶주림, 군사적 열세 속에서 청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 대신들의 의견 또한 첨예하게 맞섰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기억나실 겁니다.

(사진 네이버영화)

여기서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주화파 대표)과 청나라 치욕스러운 공격에 끝까지 맞서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예조판서 김상헌(척화파 대표)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 사이에서 인조(박해일)의 번민은 깊어지고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와 압박은 더욱 거세집니다. 여러분은 어떤 쪽인가요?

(사진 네이버영화)

최명길은 청나라에 강화를 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그것을 본 김상현이 편지를 찢어버립니다. 훗날 두 사람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청나라 감옥에 갇힙니다. 두 사람은 그제야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방법은 달랐지만, 나라를 위하는 방법은 같았으니까요. 어느 방법이 최선이었느냐는 역사가 평가하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간 버티다 1637130일 청나라가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서울 송파 삼전나루(지금의 석촌호수 부근)에 가서 항복합니다. 그리고 청나라 숭덕제에게 삼배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의 치욕을 당합니다. 한 번 절 할 때마다 세 번씩 이마를 머리에 땅에 대는 거죠. 그리고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이런 가슴 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 남한산성과 행궁입니다. 여러분은 행궁(行宮)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행궁이란 임금이 서울의 궁궐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곳입니다. 능행 길에 머물기도 하고 전쟁이나 내란 때 피난처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남한산성 행궁은 조선 16대 왕 인조 때 완공되어 여러 왕이 머무른 공간입니다.

우선 남한산성(사적 제57)부터 살펴볼까요? 남한산성은 지형이 험준합니다. 이런 자연 지형을 따라 성벽을 구축해 외침 시 쉽게 함락되지 않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곽 전체가 약 12.4km에 이르는데요,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피신해 47일간 항전한 것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201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은 완공 당시 총 227칸의 대규모 행궁이었다고 합니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크게 지었네요. 하지만 많은 전쟁을 겪으며 모두 불타 없어졌죠. 그래서 2011년에 그 일부를 복원해 2012년부터 현재의 모습으로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행궁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아주는 것이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한남루(漢南褸)입니다. 한남루는 정조 22(1798)에 광주 유수 흥억이 행궁 입구에 세운 2층 누각 문입니다. 한남루를 들어서면 좌측에 옛날 병기, 우측에 남한산성 전시실이 있습니다.

남한산성 행궁 전시실은 세계문화유산인 남한산성은 물론 행궁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조 14(1636)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7일간 싸웠습니다. 이후에도 숙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이 여주와 이천 등의 능행 길에 머물러 이용했던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눈길을 끈 사진 한 장이 있습니다. 언제 찍었는지 나와 있지 않지만, 남한산성의 옛날 모습입니다. 사진 아래 난한산성행궁이 있습니다. 그리고 행궁 주변으로 민가가 많습니다. 지금은 남한산성 한옥촌으로 변한 곳입니다. 험준한 남한산성 아래 자리 잡은 행궁에서 인조는 청나라와 맞서며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요?

외삼문을 지나면 외행전이 나옵니다.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 건물입니다. 왕이 거처하던 곳으로 정면 7, 측면 4칸으로 이뤄졌습니다. 인조 3(1625)에 준공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왕이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곳으로 사용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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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행전을 지나면 내행전이 나옵니다. 내행전은 왕이 잠을 자고 생활하던 공간입니다. 인조 2(1624)에 처음 지어졌으며 정면 7, 측면 4칸으로 전체가 28(167m²)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약 50평 아파트 크기입니다.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고 좌우 2칸씩은 온돌방과 마루입니다. 왕이 거처하는 곳이라 담으로 둘러서 쌓아 부속시설을 담밖으로 설치한 폐쇄적인 구조입니다. 현재 내행전은 2002년 중건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대군을 피해 인조가 임시로 사용한 처소라 그런지 소박합니다. 물론 그때 어떻게 꾸며졌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요, 고증을 통해 최대한 가깝게 복원해 놓은 곳입니다. 전쟁 중에 임시로 사용된 궁궐이지만 인조가 이곳에서 지낼 때는 나라와 백성들 걱정에 바늘방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행전을 지나 후원 쪽으로 나가니 소나무숲과 잘 어우러진 정자 이위정(以威亭)이 나옵니다. 단순히 쉬기 위해 만든 정자가 아닙니다. 순조 17(1817)에 광주부 유수(지금의 군수) 심상규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입니다.

이위(以威)’란 활로써 천하를 위협할 만하지만, 활과 화살이 아닌 인의와 충용으로써도 능히 천하를 위압할 수 있다는 뜻이 있는 정자입니다. 이위정을 보니 병자호란을 겪은 후 다시는 치욕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지은 정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좌승당(坐勝堂)은 순조 17(1817)에 광주부 유수 심상규가 정면 6, 측면 2.5칸의 규모로 건립하였습니다. ‘앉아서도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다라는 의미로 전략적 승리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좌승당은 광주 유수의 직무 공간이었습니다.

일장각(日長閣)은 행궁 하궐에 있던 광주부 유수가 사용하던 건물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관사인 셈이죠. 일장각은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의 다른 이름인 일장산을 건물의 이름으로 한 겁니다. 순조 29(1829)에 광주부 유수 이지연이 세웠습니다.

남한산성 행궁 안에서 보면 건물 담장 너머로 4채의 건물이 보입니다. 행궁에서 연결된 건물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서 가봐야 합니다. 행궁 관리인에게 물었더니 서울로 말하면 종묘와 같은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보니 좌전(左殿)입니다.

남한산성에는 유사시 임금이 피난할 수 있도록 행궁 시설뿐만 아니라 종묘와 사직을 모실 수 있도록 좌전과 우실을 마련하였습니다. 좌전은 남한산성 축성 당시에는 없었으나 산성 내에서 행궁을 건립하면서 숙종 37(1711)에 종묘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종묘를 좌전이라 이름 붙인 것은 좌측에 종묘, 우측에 사적을 배치한대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문은 잠겨 있어서 외부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남한산성 행궁을 소개해드렸습니다. 어떻게 보셨나요? 참 가슴 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곳이죠? 다시는 남한산성에서와 같은 슬픈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타임머신을 타고 남한산성 행궁에서 우리의 역사를 한 번 되돌아보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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