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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좋아

목숨보다 충절을 선택한 오달제 선생 묘 및 대낭장비

by 피앙새 2022. 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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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 인조 14년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해 두 달간 이어진 전쟁)은 참 가슴 아픈 역사죠. 병자호란에서 희생당한 신하가 많은데요, 당시 삼학사를 아시나요? 오달제, 홍익한, 윤집 선생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순절한 삼학사를 모신 남한산성 현절사

오달제(吳達濟, 1609~1637)는 조선 후기 문신입니다. 광해군 원년(1609) 오윤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627(인조 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34(인조 12) 26세에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습니다. 이후 병조좌랑(兵曹佐郞, 6)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副校理, 5)가 되는 등 승승장구하던 문신이었습니다. 하지만 병자호란이 그의 삶을 마감하게 했습니다.

남한산성 우익문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간 버티다 1637130일 청나라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서울 송파 삼전나루(지금의 석촌호수 부근)에서 항복합니다.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했던 주화파 의견에 따른 거죠. 그리고 청나라 숭덕제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을 당합니다.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이마를 머리에 땅에 대는 거죠. 그리고 조선은 청나라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끝까지 항복하기를 반대했던 신하가 오달제, 홍익한, 윤집 등 삼학사죠. 청나라는 이 세 사람을 비롯해 끝까지 전쟁을 주장했던 조선의 신하들을 볼모로 데려갔습니다. 그 중 삼학사는 많은 고초를 겪다 참형을 당했습니다.

삼학사는 청나라에 끌려가서도 조선 선비의 절개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삼학사 중 한 사람인 오달제 묘소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에 있어서 찾아가 봤습니다. 오달제 선생 묘는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양촌마을) 속칭에 있습니다. 마을 입구에 문화유적지임을 알려주는 '오달제 선생 묘' 안내판이 있습니다. 안내판 우측으로 약 200m를 가면 묘소 입구가 나옵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 산45-22)

묘소 입구 좌측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습니다. 오달제 묘소에 오는 사람을 위한 주차장입니다. 이 마을 근처에 해주오씨 묘지가 있어서 이곳에 묘역을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을 이름이 오산리(吳山里)인 것도 해주오씨와 관계가 있습니다.

오달제 선생 묘소로 올라가려니 비석이 하나 보입니다. 오달제 치적을 기리기 위한 대낭장비(帶囊藏碑)입니다. 앞서 소개해 드렸듯이 오달제는 청나라에 끌려가 처형당했잖아요, 그래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혁대()와 주머니(, 주머니 낭)를 묻었다는 뜻으로 세운 비석입니다. 이 비석은 1828(순조 28)에 오달제 손자 오경원이 세운 것입니다.

대낭장비에서 조금 올라가면 오달제 선생 묘소로 오는 계단이 보입니다. 잡초가 많이 우거져 있는데요, 용인시에서 관리를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계단 앞에 오달제 묘에 관한 안내판이 있습니다. 앞서 소개한 내용이 요약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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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올라보니 오달제 묘소 앞에는 두 부인의 묘소가 있습니다. 묘 앞에는 상석, 향로석, 좌우에는 문인석과 동자승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망주석도 있습니다. 두 부인의 묘비를 보니 증 정경부인 고령신씨 지묘(첫째 부인)와 정경부인 의령남씨 지묘(둘째 부인)라고 쓰여 있습니다. 조선 시대는 부인 외에 후처도 둘 수 있었죠. 그래서 오달제 부인의 묘가 두 개가 있습니다.

오달제 선생이 심양의 옥중에서 두 번째 부인 남씨에 보낸 시를 보면 참 가슴이 아픕니다. 왜 이런 시를 보냈을까요? 먼저 그 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심옥기내남씨(瀋獄寄內南氏) : 심양 옥중에서 아내 남씨(오른쪽 묘)에게 보낸 편지

琴瑟恩情重(금슬은정중) 부부의 은정이 무거운데
相逢未二朞(상봉미이기) 만난 지 이태도 못 되어
今成萬里別(금성만리별) 오늘 만리를 헤어지며
虛負百年期(허부백년기) 백년 기약을 헛되어 저버리오
地闊書難寄(지활서난기) 땅이 멀어 편지 부치기 어렵고
山長夢亦遲(산장몽역지) 산 높으니 꿈길도 더디기만 하오
吾生未可卜(오생미가복) 내 목숨은 기약할 수 없으니
須護腹中兒(수호복중아) 부디 배 속의 아이를 잘 보살펴주오

시를 읽어보니 오달제는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한 지 2년도 채 되지 않은 때에 병자호란으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습니다. 두 번째 아내에게 백년해로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며 배 속의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편지를 전한 것이죠. 오달제는 자신이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것을 예감했나 봅니다. 부인을 향한 오달제의 마음인가요? 묘소 입구에 들꽃이 많이 피었습니다.

두 명의 부인 묘소 뒤에 오달제 선생 묘가 있습니다. 묘는 시신이 없는 묘입니다. 그가 차고 있던 혁대와 주머니만 묻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묘비도 없습니다. 오달제 선생 묘라고 해서 뭔가 웅장하게 해놓았을 줄 알았는데요, 막상 와보니 일반 묘와 다를 바 없습니다.

둘째 부인 남씨는 항상 오달제 선생의 혁대와 주머니를 갖고 다니면서 혼을 불러 장사 지내는 것을 반대해 남씨가 죽은 다음에야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낭장비 비석도 세운 거죠. 중국 심양 성 어딘가에 오달제 선생의 시신이 있을 겁니다. 나라가 굴욕을 당하면 이렇게 관리의 삶도 비참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오달제는 불과 29살에 청나라에 끌려가 죽었습니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습니다. 포은 정몽주를 기린 충렬서원(용인시 소재)1977년 유림의 결의로 오달제 선생도 추가로 모시고 있습니다. 대쪽 같은 충절을 죽음으로 지킨 오달제 선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오달제 선생같은 사람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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