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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청년 김대중이 첫 눈에 반했던 차용애여사

by 피앙새 2009. 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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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초 김대중전대통령이 서거하셨습니다. 감옥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정치적 핍박을 받을 때 대통령 곁에서 힘이 되준 사람은 역시 영부인 이희호여사입니다. 이여사 없는 김대중전대통령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희호여사를 만나기 전에 청년 김대중이 한 눈에 반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차용애여사입니다. 목포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결혼후 14년간 살면서 홍일, 홍업씨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후 한창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첫 번째 부인 차용애여사는 1959년 하늘나라로 먼저 떠났습니다. 김대중전대통령이 서거하신 후 이희호여사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함께 한 반려자로 투영되고 있지만 그 전에 차용애여사가 있었습니다.

청년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차용애여사가 인동초의 씨앗을 뿌렸다면 이희호여사는 그 씨앗을 잘 가꾸어 꽃을 피운 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김전대통령은 그제 방송된 MBC <TV 김대중 평전>에서 차용애여사와 사별후 가끔 그녀의 무덤을 찾아가 "어려울 때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다"는 말을 한다고 했습니다. 비록 이승에서 함께하지는 못해도 차씨는 이희호여사만큼 김전대통령에게는 평생의 반려자였습니다. 그래서 김전대통령이 하늘나라에서 만날 차용애여사의 생을 한번 되짚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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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전대통령이 한 눈에 반해버린 첫번째 부인 차용애여사와 장남 홍일, 차남 홍업씨)

사람은 누구나 첫 사랑이 있게 마련입니다. 김대중전대통령의 첫 사람은 바로 목포상고 동기이자 친구의 동생인 차용애여사였습니다. 1945년 해방 무렵 차용애여사는 목포에서 큰 인쇄소를 경영하는 차보륜씨의 딸로 일본 이나(伊那)여학교에서 공부하던 재원이었습니다. 일본의 항복이 가까워질 무렵 미국이 무차별로 일본을 폭격하자, 차여사 아버지는 딸을 일본에서 즉시 귀국시켰습니다. 당시 일본 이나여학교에서 공부하던 차여사의 친구들은 강제로 군수공장에 동원되었다가 미군의 폭격으로 모두 사망했습니다. 아버지의 선견지명 덕분에 차여사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고 이것이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친구 동생인 차용애여사를 처음 본 김전대통령은 당시 차여사의 첫 인상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운명이란 그렇게 놀랍고 또 아름다운 것이다. 그녀(차용애)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녀를 목격했다. 그 또한 운명이리라. 그녀는 하얀 원피스 차림에 꽃무늬가 있는 양산을 받쳐들고는 마치 잰걸음이라도 세고 가듯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나서 그냥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한 눈에 반해 버리고' 말았다. 단정한 머릿결이며 하얀 피부색이 항구의 어수선하고 칙칙한 분위기 속에서 피어난 백합같다는, 그 느낌 그대로였다.
(출처 : 김대중, '나의 삶, 나의 길' 저서)

청년 김대중을 반하게 한 차여사로 인해 김전대통령은 상사병에 걸릴 정도였습니다. 하루라도 그녀를 보지 않으면 힘들었습니다. 매일 친구를 만나기 위해 그녀 집을 찾았지만 사실은 차여사 때문이었습니다. 차여사는 오빠를 통해 청년 김대중이 명문 목포상고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얼굴도 잘 생겼기 때문에 호감을 갖기 시작합니다. 두 사람은 짧은 기간에 급격히 가까워져 어느새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혼은 쉽지 않았습니다. 차여사의 아버지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한 것입니다. 당시 청년 김대중은 징병검사를 마치고 언제 징용될지 모르는 처지였습니다. 징용가서 죽을지도 모르는 청년에게 딸을 줄 수 없는 아버지의 심정은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차여사의 아버지는 그래서 딸을 위해 점찍어 놓은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의 입장을 들어주고 김대중에 호의적이었습니다.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두 사람은 1945년 4월에 결혼을 하고 목포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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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무렵 차용애여사를 만나던 당시의 청년 김대중과 15대 대통령 당선 당시 김대중전대통령)

청년 김대중은 결혼후 흥국해운 창업(1946), 목포일보 인수(1948) 등으로 사업가의 수완을 발휘합니다. 그러다 1954년 29세의 나이로 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정치판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정치 초년생 김대중은 민의원선거 패배후 민주당 장면박사 밑에서 본격적인 정치 수업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58년 4대 민의원 선거에 재도전하지만 자유당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1959년 보궐선거와 5대 총선에서도 잇따라 패배의 쓴잔을 마신 청년 김대중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후 사업가으로 벌어놓은 돈을 모두 날렸습니다.
남편 김대중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후 차용애여사의 생활도 순탄치 않았지만 아들 둘(홍일, 홍업)을 낳아 현모양처로 청년 김대중을 헌신적으로 내조했습니다.

그러나 운명적인 사랑 차용애여사와 청년 김대중의 인연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결혼 14년만인 1959년,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후 잇따라 선거에 참패하면서 김전대통령이 한창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차용애여사는 두 아들을 남기고 33살의 나이에 홀연히 김전대통령 곁을 떠났습니다. 1년여만에 두 차례나 선거를 치루면서 김전대통령은 깊은 좌절과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묵묵히 내조하며 부정선거에는 목숨을 내걸고 싸우라고 격려하던 차용애여사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선거빚과 실의에 빠져 지내다 약물쇼크로 사망한 것입니다. 김전대통령의 절망감은 참으로 깊었습니다.

“집안일은 걱정 말고 후회하지 않도록 싸워달라”고 언제나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가난한 가운데 어떻게든 가계를 꾸려나가고, 어린 장남과 차남을 기르면서 선거운동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주도한 시위의 선두에서 행진하기도 했다.

아내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그것은 실은 자살이었다는 소문이 내 귀에 들려왔다. 너무나 생활이 힘들어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런 소문이 날 정도로 아내가 격은 고통은 큰 것이었다. 그 고생을 남들도 알았고, 그래서 그런 소문이 난 것이다. (출처 : 김대중, '나의 삶, 나의 길' 저서)


인동초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내조한 것은 이희호여사지만 그 인동초 씨앗을 뿌린 사람은 바로 차용애여사였습니다. 청년 김대중이 소설속에서나 나옴직한 러브스토리, 즉 '한 눈에 반한' 차여사는 김전대통령이 이희호여사와 결혼후 그 이름이 대중들에게 잊혀졌을 뿐입니다. 김대중전대통령은 이제 고생만 시켜 평생 미안해하던 차용애여사와 하늘나라에서 만나 이승에서 갚지 못한 빚을 갚을 것입니다.

삼가 고 김대중전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합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셔서 편히 쉬시길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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