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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 그녀는 한마디로 딱히 설명할 수 없는 여자입니다. 다음(Daum)에서 한비야를 검색해보면 그녀의 공식직함은 오지여행가로 나옵니다. 그러나 한비야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녀는 유난히 검은 피부의 외국인과 찍은 사진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빈민구호, 기부, 선행, 월드비젼, 바람의 딸 등 수없이 많은 이미지로 떠오르는 여자입니다. 그녀는 현재 대한민국 청소년, 대학생들 뿐만 아니라 전 연령대에 걸쳐 가장 존경하는 인물중의 한 사람입니다. 오지탐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방송에도 자주 출연했었는데, 어제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그녀의 오지 인생을 이야기했습니다.
하이톤의 빠른 말은 마치 속사포와 같았지만 명랑 쾌활한 그녀의 오지 여행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 가는줄 몰랐습니다. 오지여행을 그렇게 많이 다녔지만 그녀가 '길치'라는데 놀랐습니다. 10살때부터 부모님이 방에 붙여놓은 세계지도를 보며 '세계일주' 꿈을 키워온 그녀는 중2때 정치부기자였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일찍 사회로 나와 아르바이트로 인생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26살에 늦깎이 새내기로 대학에 들어가 언론홍보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유타대를 졸업하고 국제 홍보회사에서 잘 나가던 여성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안정된 삶이 보장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인생의 전환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1991년 35살에 회사에 사표를 내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필생의 꿈인 '걸어서 세계일주'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배낭 하나 달랑 둘러매고 1993년부터 지구촌 곳곳을 누볐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쓴 책이 바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이란 책입니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우리 나라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한 것이 바로 배낭여행입니다. 너도 나도 한비야를 닮고 싶어 배낭 하나 매고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대학생때 배낭여행 한번 못하면 이젠 팔불출이 되는 시대가 됐습니다. 한비야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꿈과 배포를 심어주었습니다. 돈을 잘 쓰지 않아 외국 배낭여행객에는 '배낭여행의 사부'로 불렸습니다.
한비야는 이름이 참 독특합니다. 날 비(飛), 들 야(野) 날 비에 들 야자를 이름에 쓰는 건 참 드문 일인데, 사람 팔자는 이름대로 사나봅니다. 그녀는 이름에 야(野)자가 들어가서 그런지 전 세계를 광야처럼 날아다니는 것이 아닐까요? 2008년 올림픽에 참가한 국가수가 204개국입니다. 그녀는 현재 98개 나라를 다녔습니다. 아직 가봐야 할 곳이 많습니다. 그녀가 지구촌 곳곳을 누비는 것은 처음에는 여행이 목적이었지만 아프리카 난민들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이 빈민구호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3초마다 한 명씩 굶어죽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구호활동에 관심을 갖고 800원짜리 링겔 한병이면 사람 목숨 한 명을 구할 수 있다며 전세계를 누비고 다닙니다.
아프리카에서 빈민 구호를 할 때 그녀가 가장 보람을 느낀 것은 에이즈에 걸린 모자였습니다. 엄마는 에이즈에 감염된 아이에게 정성스럽게 구호음식을 먹이며 한비야 일행에게 고맙다며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한비야 역시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엄마의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다음날 다시 그 모자가 사는 마을에 갔는데, 엄마가 죽어 있었습니다. 어제 한비야 일행이 준 식사가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불쌍하게 죽은 아프리카 여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마지막 식사를 챙겨준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한답니다.
여자 혼자 몸으로 걸어서 오지 여행을 다니느라 풍토병에 수없이 아파하고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습니다. 이디오피아에서는 말라리야 예방약을 먹고 부작용 때문에 머리가 다 빠질 정도로 힘들었을 때도 있었고, 첫 세계여행지 네팔에서는 28일간 머리를 감지 못했습니다. 그런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내가 다시 여기에 올 수 있을까 하고 이를 악물고 참았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몇일씩 씻지 못할 때는 몸서리치게 싫을 때도 있었지만 배고픔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2주동안 물도 못 넘길 정도로 아팠는데, 라면만 먹으면 이상하게 힘이 났습니다. 그녀는 그래서 배낭여행을 떠날 때는 꼭 라면을 챙깁니다. 라면과 한국음식이 그녀의 보약입니다.
그녀는 2001년부터 국제구호기구 월드비전에서 긴급구호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그녀는 또 다른 경험을 향해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남부 아프리카 짐바브웨로 식량사업 매니저 훈련을 받기위해 지난 8월 12일 떠났습니다. 오지에서 현장 구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긴급구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아 구호 설계도 직접 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비야는 195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이제 51살입니다. 50이 넘으면 여자들은 화장이 아니라 분장을 할 나이입니다. 가끔씩 TV에 화장한 얼굴로도 나오지만 우리 이웃집 아줌마처럼 화장 안한 얼굴이 어울립니다. 그리고 사파리 복장에 검게 그을린 얼굴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녀의 꿈은 전세계를 다 돌아보는 것입니다. 현재 98여개국을 다녔으니 이제 약 반을 돌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세계 여러나라를 돌기 위해 그녀는 또 다른 모험을 할 것입니다. 그녀가 모험을 하면 할 수록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겐 반가운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엄마, 지구촌 빈민 천사가 바로 한비야입니다.
그녀는 '고통없이 뭔가를 해내려는 건 도둑심보'라고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댓가를 반드시 치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비야의 말에 필자 역시 도둑심보가 아닌가 반성을 해봅니다.
하이톤의 빠른 말은 마치 속사포와 같았지만 명랑 쾌활한 그녀의 오지 여행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 가는줄 몰랐습니다. 오지여행을 그렇게 많이 다녔지만 그녀가 '길치'라는데 놀랐습니다. 10살때부터 부모님이 방에 붙여놓은 세계지도를 보며 '세계일주' 꿈을 키워온 그녀는 중2때 정치부기자였던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일찍 사회로 나와 아르바이트로 인생을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26살에 늦깎이 새내기로 대학에 들어가 언론홍보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리고 미국 유타대를 졸업하고 국제 홍보회사에서 잘 나가던 여성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안정된 삶이 보장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인생의 전환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1991년 35살에 회사에 사표를 내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습니다. 필생의 꿈인 '걸어서 세계일주'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배낭 하나 달랑 둘러매고 1993년부터 지구촌 곳곳을 누볐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쓴 책이 바로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이란 책입니다. 이 책이 출간된 이후 우리 나라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한 것이 바로 배낭여행입니다. 너도 나도 한비야를 닮고 싶어 배낭 하나 매고 외국으로 떠났습니다. 대학생때 배낭여행 한번 못하면 이젠 팔불출이 되는 시대가 됐습니다. 한비야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꿈과 배포를 심어주었습니다. 돈을 잘 쓰지 않아 외국 배낭여행객에는 '배낭여행의 사부'로 불렸습니다.
한비야는 이름이 참 독특합니다. 날 비(飛), 들 야(野) 날 비에 들 야자를 이름에 쓰는 건 참 드문 일인데, 사람 팔자는 이름대로 사나봅니다. 그녀는 이름에 야(野)자가 들어가서 그런지 전 세계를 광야처럼 날아다니는 것이 아닐까요? 2008년 올림픽에 참가한 국가수가 204개국입니다. 그녀는 현재 98개 나라를 다녔습니다. 아직 가봐야 할 곳이 많습니다. 그녀가 지구촌 곳곳을 누비는 것은 처음에는 여행이 목적이었지만 아프리카 난민들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가 없이 빈민구호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3초마다 한 명씩 굶어죽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구호활동에 관심을 갖고 800원짜리 링겔 한병이면 사람 목숨 한 명을 구할 수 있다며 전세계를 누비고 다닙니다.
아프리카에서 빈민 구호를 할 때 그녀가 가장 보람을 느낀 것은 에이즈에 걸린 모자였습니다. 엄마는 에이즈에 감염된 아이에게 정성스럽게 구호음식을 먹이며 한비야 일행에게 고맙다며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한비야 역시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엄마의 눈물을 닦아 주었습니다. 다음날 다시 그 모자가 사는 마을에 갔는데, 엄마가 죽어 있었습니다. 어제 한비야 일행이 준 식사가 마지막 식사였습니다. 불쌍하게 죽은 아프리카 여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마지막 식사를 챙겨준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한답니다.
여자 혼자 몸으로 걸어서 오지 여행을 다니느라 풍토병에 수없이 아파하고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습니다. 이디오피아에서는 말라리야 예방약을 먹고 부작용 때문에 머리가 다 빠질 정도로 힘들었을 때도 있었고, 첫 세계여행지 네팔에서는 28일간 머리를 감지 못했습니다. 그런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다면 내가 다시 여기에 올 수 있을까 하고 이를 악물고 참았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몇일씩 씻지 못할 때는 몸서리치게 싫을 때도 있었지만 배고픔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2주동안 물도 못 넘길 정도로 아팠는데, 라면만 먹으면 이상하게 힘이 났습니다. 그녀는 그래서 배낭여행을 떠날 때는 꼭 라면을 챙깁니다. 라면과 한국음식이 그녀의 보약입니다.
그녀는 2001년부터 국제구호기구 월드비전에서 긴급구호 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나이 50이 넘었는데도 그녀는 또 다른 경험을 향해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남부 아프리카 짐바브웨로 식량사업 매니저 훈련을 받기위해 지난 8월 12일 떠났습니다. 오지에서 현장 구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긴급구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아 구호 설계도 직접 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비야는 195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이제 51살입니다. 50이 넘으면 여자들은 화장이 아니라 분장을 할 나이입니다. 가끔씩 TV에 화장한 얼굴로도 나오지만 우리 이웃집 아줌마처럼 화장 안한 얼굴이 어울립니다. 그리고 사파리 복장에 검게 그을린 얼굴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녀의 꿈은 전세계를 다 돌아보는 것입니다. 현재 98여개국을 다녔으니 이제 약 반을 돌았습니다. 앞으로 남은 세계 여러나라를 돌기 위해 그녀는 또 다른 모험을 할 것입니다. 그녀가 모험을 하면 할 수록 기아와 질병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겐 반가운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엄마, 지구촌 빈민 천사가 바로 한비야입니다.
그녀는 '고통없이 뭔가를 해내려는 건 도둑심보'라고 말합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만한 댓가를 반드시 치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비야의 말에 필자 역시 도둑심보가 아닌가 반성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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