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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다반사

해고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AS맨

by 피앙새 2008.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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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컴퓨터를 새로 샀는데 최근 들어 소음이 너무 많이 났습니다. 인터넷을 할 때마다 '드르럭 드르럭~~' 하는 소리가 여간 신경쓰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참고 쓰려다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했더니 A/S 기사를 보내주겠다네요. 전화 후 하루만인 29일(토), 낮 12시쯤 A/S 기사가 방문했습니다. 기사분은 컴퓨터 켜보더니 단번에 '파워'가 제대로 동작이 되지 않아서 소음이 난 것이라고 알려줬습니다. 다행히도 구입한 지 1년이 안 되었기 때문에 교체비는 무상이라며 파워를 새 것으로 달아주었습니다.

(소음이 나 고친 컴퓨터. '매우 만족'으로 답해달라던 AS 기사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전화 문의할 때 소음이 난다고만 했을 뿐인데, PC증상에 따라 어떤 기기가 필요할지 미리 예측해서 부품을 가지고 온 A/S 기사를 보고 놀랐습니다. 물론 그분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PC를 수리하러 다니니 '척하면 삼천리'겠지요. 파워 부품을 새로 달았더니 소음이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본사에서 전화 오면 '매우' 만족했다고..."

수고하신 기사님을 위해 커피 한 잔을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마셨습니다. 이날은 3시까지 일하는데, 밀린 집이 네 집이나 된다며 빨리 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35살쯤 되었을까 싶은 A/S 기사의 얼굴 표정에서 마음이 무척 급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급히 일을 마무리하고 현관에서 인사를 나누려는 찰나, AS 기사는 멈칫멈칫 제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보였습니다.

"저… 나중에 본사에서 전화가 올 건데요. 서비스 만족도를 물을 텐데, 가능하면 '매우' 만족이라고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네. 그러지요."

저는 제가 서비스비를 주지 않아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굳이 싫다고 할 이유도 없으니 긍정적인 대답으로 그분을 안심시켜 드렸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대부분의 AS 기사는 별도의 하청업체에서 보내는 거라고 하네요. 이 하청회사에서 일하는 A/S 기사들은 서비스 실적과 고객들 만족도에 따라 한 달 한 달 살얼음판을 걸어가듯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객 만족도가 낮을 경우, 회사를 그만 두어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A/S 기사들이 서비스 후 본사에서 전화가 오면 '매우' 만족'으로 답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식의 '부탁'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최근처럼 경기가 침체돼 있을 때는 아무래도 실직의 공포가 더 크겠지요. "고맙습니다" 하고 돌아서는 그 기사분의 어깨에 지금의 경제 불황과 실직의 공포가 무겁게 놓여져 있는 것 같아 조금 안쓰러웠습니다.

"애들 학원비라도..." 발이 부르트도록 뛰는 주부사원

이런 사정은 비단 컴퓨터 A/S 기사만이 아니겠지요. 요즘은 남편 월급만으로는 살기가 빠듯해 정수기 관리해 주는 일을 하는 주부들이 많습니다. 정수기 '코디'라고 하나요?

얼마 전 우리 집에도 '코디'가 방문했습니다. 정수기 필터를 3개월에 한 번씩 교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 코디는 필터를 갈면서 주부 입장에서 꼼꼼하게 청소까지 해주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차 한 잔을 주면서 수고했다는 말을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월급은 그리 많지만 아이들 학원비라도 보탤 수 있어 일을 시작했다는 이 분은 남편 월급만으로 살기는 요즘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남편 역시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는데, 언제 실직할지 몰라 전전긍긍하기에 6개월 전부터 정수기 A/S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코디는 실적으로 월급을 받기 때문에 실적이 없는 날은 교통비, 밥값 빼고 나면 남는 것도 없다면서도 열심히 하는 달에는 학원비 이상도 벌 수 있어 발이 부르트도록 다닌다는 그 분 역시, 제게 컴퓨터 A/S 기사분과 같은 부탁을 했습니다.

"고객 만족도에 따라 일을 많이 주기도 하고 적게 주기도 하기 때문에 서비스 만족도를 잘 받아야 해요. 나중에 본사에서 서비스 만족도를 묻는 전화가 오면 '매우' 만족이라고 말씀해주세요."

컴퓨터 A/S 기사처럼 코디 역시 비정규직으로 해고의 불안감을 안고 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해고 불안없는 사회, 빨리 왔으면

오늘 이 시간에도 방문 서비스 기사들은 고객들 요청에 따라 하루에 몇 집씩 컴퓨터를 고치러 다니거나 정수기를 관리해 주러 다닐 것입니다. 한 집 한 집 다닐 때마다 고객만족도를 잘 받아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는 그들. 잘못 평가되면 '해고'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그들이 받을 스트레스는 얼마나 클까요. 고객 입장인 저로서는 친절한 서비스를 받아 기분은 좋았지만, 쭈뼛쭈뼛 하며 어렵게 '매우 만족'이라고 답해달라던 그 A/S 기사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이 부디, 해고의 불안 없이 편안히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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