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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행복

전업주부가 직장을 다녀보니

by 피앙새 2009.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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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전업주부에서 워킹맘이 되었습니다. 결혼전에 직장을 다니다 결혼후 살림만 하다 아이들도 어느 정도 다 키웠고, 하루 종일 남는 시간 소비(?)하는 것이 아까워 지인의 소개로 출판사에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원고 교정일을 주로 하며 하루 6시간 근무하지만 다시 일을 시작하니 새로 태어난 기분입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사회에 나와 보니 마치 어항속에서 놀다 바다에 나온 기분입니다. 그러나 그 바다라는 것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제가 일하는 사무실은 모두 10명이 일을 합니다. 이중 정규직원은 4명, 그리고 저처럼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비정규직은 6명, 남녀로 보면 남자 2명, 여자 8명입니다. 저마다 신분과 성별은 달라고 한가지 공통점은 모두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규직원 뿐만 아니라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여섯명은 회사에서 그만 두라는 말이 없는 한 계속 일하고 싶다는 바람입니다.

이곳에서 일하면서 남자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받는 직장 스트레스가 뭔지 알았습니다. 제가 일하는 사무실의 P과장님은 46살의 중년 남성입니다. 승진이 안돼 고생은 많이 하지만 인정도 못받고 일하는 전형적인 샐러리맨 스타일입니다. 자녀들이 고등학교 연년생이라 교육비 등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갈 때지만 출판사 월급만으로 생활하기 어려워 아내가 1년전부터 보험설계사로 맞벌이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적이 좋지 않아 오히려 고생만 한다며, 그만 두라고 한답니다.
(전업주부에서 다시 직장을 다녀보니 남편의 직장생활 스트레스 등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진은 드라마 워킹맘)

본사에서 매달 떨어지는 출판 작업량을 마치려면 한달에 10일 이상 야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파트타임직은 시간이 되면 퇴근하기 때문에 정규직 4명이 늦게까지 잔업을 처리해야 합니다. 파트타임직으로 고용된 6명도 본사에서 내려준 예산에 맞게 고용된 지라 일이 많다고 그 이상 추가적으로 인원을 늘릴 수도 없습니다. 일이 많으면 결국 총 책임자인 P과장님에게 그 스트레스가 다 갑니다. 사오정을 넘어 오륙도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해고 안당하고 계속 일을 하려면 그만한 고생은 해야 하나 봅니다.

일이 많은 날은 아침부터 파트타임직 여섯명에게 교정 등 그날 일할 분량을 정해주는데, 가끔씩 파트타임직들이 퇴근할 무렵인 오후 4시쯤 본사에서 갑자기 추가 일거리가 떨어질 때도 많습니다. 이럴 때 가장 똥줄 타는게 바로 P과장님입니다. 정규직중 여직원 1명이 있는데, 아직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런지 저녁에 미리 약속이 있으면 아무리 일이 많아도 퇴근해 버립니다. 역시 남자들의 사회생활과 여자들의 사회생활관은 조금 차이가 있나봅니다. 물론 모든 여자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P과장의 머리는 희끗 희끗하고 세치도 많습니다. 세월의 자연스런 연륜이라기 보다 그가 가족을 부양해야할 책임감때문에 회사에서 느끼는 모든 어려움을 몸으로 지탱해온 인생의 훈장처럼 보였습니다. P과장을 보면서 가끔씩 남편을 생각합니다. 하는 일은 달라도 직장 상사에게 또는 하급자에게 느끼는 어려움은 매한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말, 그리고 화내고 싶을 때도 많겠지만 꾹 참고, 일을 하는 P과장의 모습이 바로 제 남편의 모습인 것입니다.

제가 다시 사회생활을 하기 전에는 남자들이 사회생활 하면서 이렇게 힘들 줄 몰랐습니다. 남자들이 회사에서 점심 먹으러 나가 식당에서 아줌마들이 모여 밥을 먹는 것을 보고, "남자들은 회사에서 5천원짜리 밥 먹으며 고생하는데, 여자들은 비싼 음식 시켜 먹으며 잘 들 논다!"는 말을 한다는데, 바로 그 아줌마들 속에 저도 있었습니다. 이젠 그 속에 있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있고 싶어도 제가 힘들게 돈을 벌어보니 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1월부터 일을 시작해서 어제 첫 월급을 받았습니다. 첫 월급 타면 남들은 부모님 내복과 양말을 사다 준다는데, 아직 월급 봉투에서 천원짜리 한장 꺼내쓰지 않았습니다. 왜 내가 번 돈은 이리도 아까운지 모르겠습니다. 매달 20일 급여를 받는데, 이번 달은 한달치 급여가 아니라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고생해서 번 돈이라 그런지 이 돈을 쓰기가 무척 아까웠습니다. 지금까지 남편 봉급은 아까운 줄 모르고 썼는데, 제가 번 돈이라고 아깝게 느끼다니... 순간 남편에게 너무 너무 미안했습니다.

파트직이라 급여통장으로 송금해주는 것도 아니고 직접 봉투에 넣어 급여를 받고 보니 기분은 좋았습니다. 힘도 들었고, 남의 돈 먹기가 쉽지 않구나, 세상살이가 참 팍팍하구나 하는 생각 등 별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20년 이상의 세월을 한결같이 가족을 위해 묵묵히 일하며 매달 월급을 타다주는 남편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젠 남편이 타다준 월급도 쉽게 못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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