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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향수

설날 앞두고 호떡집 불난듯 하던 방앗간

by 피앙새 2009.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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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설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설날 하면 떡국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는 떡국을 이제는 먹기가 두렵습니다. 한 살 덕 먹는 것이 싫을 나이가 됐습니다. 사는게 고단하고 힘들었던 옛날에는 설날에 먹던 가래떡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이야 모양도 예쁘고, 맛도 있는 각양 각색의 떡이 많이 나왔지만 배고픔을 채우기 바빴던 어린 시절엔 가래떡 하나면 최고였습니다.

설날 전날이 되면 동네 방앗간은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바쁩니다. 방앗간이 1년중 가장 바쁜 날이 아마도 설날 전날일 겁니다. 미리 물에 불려놓은 쌀에 물기를 뺀 후 어머니는 큰 그릇에 담아 머리에 이고 방앗간을 갑니다. 저도 어머니를 따라 방앗간을 따라 나섭니다. 방앗간은 동네 아주머니들이 쌀을 가지고와 그릇을 쭉 늘어놓고, 차례를 기다립니다. 쌀을 기계로 빻아서 한시간쯤 푹 찐후 가래떡이 나오는 기계안에 쏟은후 방앗간 아저씨가 주걱으로 누루면 가래떡이 쭉 쭉 빠져 나옵니다.

뜨거운 가래떡은 바로 아래 찬물속으로 빠지는데, 방앗간 아줌마가 가위로 싹뚝 싹뚝 자릅니다. 쌀 한말이 가래떡으로 다 나오면 마지막에 남는 가래떡 꼬리를 아줌마가 꼬마들에게 나눠줍니다. 뜨겁고 말랑말랑하고 갓 찐 가래떡 꼬리는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설날 전이면 동네 꼬마들은 으례히 방앗간을 놀이터 삼아 가래떡 꼬리 받아 먹는 재미로 놀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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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도 가래떡 꼬리에 대한 추억이 있습니다. 설날이면 떡 한말 변변히 못해 먹을 정도로 어렵게 성장한 남편은 어린 시절에 이 다음에 크면 가래떡 한말을 해서 뜨끈 뜨끈한 방안에서 원없이 싫컷 먹어보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결혼초 어느 설날 남편은 갑자기 방앗간에서 가래떡 한말을 해오라고 했습니다. 그 많은 떡을 누가 다 먹느냐며 시장에서 몇 개 사서 떡국을 끓이면 된다고 했더니 무조건 해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댁에 가져가려보나 하고 가래떡 한말을 해왔습니다.

남편은 가래떡 한말을 보더니 어릴적 그렇게 먹고 싶었던 떡이라며, 긴 가래떡 2개를 단숨에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더는 먹지를 못했습니다. 남편은 마음 같아서는 한말 다 먹을 것 같은데, 못먹겠다며 어릴적 설날에 가래떡도 못먹던 시절을 이야기 했습니다. 얼마나 가래떡에 한이 맺혔으면 떡 한말을 뽑아다 먹으려 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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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 아니더라도 가끔 남편과 함께 재래시장을 가면 남편은 꼭 가래떡을 삽니다. 긴 가래떡을 조금씩 먹으며 그 때 어머니, 아버지께서 해주지 못했던 떡을 남편 스스로 사서 먹는 듯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은 설날에 떡국보다 가래떡 먹기를 더 좋아합니다. 이번 설날에도 남편을 위해 가래떡을 준비하려 합니다. 떡국을 끓이기 위한 가래떡이 아닙니다. 남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며 가난한 그 시절의 추억을 먹기 위해서입니다. 가래떡 맛은 없지만 그 시절 추억과 향수는 아주 일품입니다.

요즘은 방앗간에 가서 가래떡을 뽑는 집도 드뭅니다. 시장에서 떡국 끓일 양만 사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즘 아이들은 가래떡을 잘 먹지도 않습니다. 가래떡보다 더 맛있는 햄버거나 현대식 떡이 개발되어 가래떡이 찬밥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래떡에는 설날이면 우리네 서민들이 가장 즐겨먹던 떡이었고, 그 떡안에 수많은 애환이 담겨 있습니다.

배고팠던 시절, 친구들과 뜨거운 가래떡 꼬리를 호호 불며 나누어 먹던 추억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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